복지정보 '엄마와 딸, 같은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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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기획송민정 댓글 0건 조회 2,030회 작성일 13-04-15 10:43본문
고용노동부와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은 최근 '2013 장애인고용 인식개선 작품현상공모전' 입상작을 발표했다.
앞서 공단은 장애인고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고용촉진 강조기간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에세이,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를 실시해왔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작품현상공모전의 주제는 ‘장애인고용’으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환경 및 실내디자인 등 네 분야 입상작 총 27점이 결정됐다. 본지는 환경 및 실내디자인을 제외한 입상작을 분야별로 소개할 예정이다. 다섯번째는 에세이 분야 장려 작품.
엄마와 딸, 같은 꿈을 꾸다...
이인숙(여, 57세, 강원 춘천)
스물다섯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7남매의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해 큰 어려움도 없이 자랐고 학교 졸업 후에도 바로 직장에 들어가 바쁘게만 살아왔다.
남편은 나와는 사뭇 다른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6.25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단둘이 30년 가까이를 살아온 것이었다. 그러한 다름에 마음이 끌렸던 것인지 남편과 나는 만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어떤 엄마가 될지도 전혀 몰랐다. 단지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고 행복하게만 살 줄 알았다.
남편은 외롭게 자란 지라 유난히도 아이를 기다렸다. 결혼을 한지 1년 8개월 만에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심한 일도 안하고 편하게만 열 달을 지냈다.
그런데 예정일이 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병원을 찾아가니 뱃속 아이가 너무도 커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의사가 말했다. 유도 분만까지 하여 정말 힘들게 아이는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첫 딸 아이는 가족들 모두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그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었다.
정말 그때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아이에게 황달이 조금 있다고 해서 걱정을 했지만 병원에서 준 약을 아이에게 매일 매일 먹이고 또 며칠 후에 병원 치료 받으러 갔을 땐 괜찮아졌다고 하여 한시름 놓았다.
어느덧 아이의 첫돌이 되었다. 첫돌이 지나고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한발 두발씩 걸어 다녔다. 그런데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못할 말이 없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냉장고 텔레비전...” 하면서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계속 중얼 거리는 것이었다.
주위에 사람들은 아이가 아주 천재야 저렇게 영리할 수는 없어 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나는 아이가 진짜 천재인 줄 알았고 커서도 비범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때 만해도 시어머니가 혼자 사셨으니 외롭기도 하고 해서 큰 딸 아이는 할머니한테 보내고 나는 둘째딸을 데리고 있었다.
남편은 그때 직장 생활에 항상 바빴고 늦은 밤에야 퇴근을 하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큰 아이를 보러 가고 둘째 아이를 열심히 기르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시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고 놀라서 이야기를 했다. 나도 놀란 마음에 아이를 찾아갔다.
아이를 보는 순간 그전과는 많이 달랐다. 힘이 쭉 빠져있고 고개가 끄덕끄덕 하면서 잘 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정말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다음날 새벽 같이 아이를 데리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러자 여러 가지 검사가 시작되었다. 20일 정도 입원해서 검사한 결과 뇌성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나에게 두 살 난 딸아이의 뇌성마비 판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었다. 6개월 운동하고 치료하면 괜찮아진다던 아이가 점점 더 힘이 없어지고 잘 걷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니까 그런 아이를 보고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해 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의연하고 강해졌다.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어야 장애 아이의 엄마로 살 수가 있었다. 그때는 열심히 물리치료 받으면 아이가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쩔 수 없이 둘째아이를 또 시어머니한테 또 보내야 했다. 그때는 강원도 영월에 살고 있었는데 새벽에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시청을 지나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하면 물리치료 50분 작업치료 50분 그리고 준비해 온 김밥을 병원에서 둘이 먹고 다시 집으로 오면 밤 12시가 넘었다.
그때 아빠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를 만나면 큰일이라도 한 듯이 반가워하면서 안겼다. 그렇게 몇 년을 열심히 다녔지만 별로 좋아지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아이의 치료를 위해 정말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서 새로 어떤 검사나 치료법이 생겼다고 할 때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고 유명한 침술사가 있다고 하면 나는 아이를 업고 어디든 쫓아갔다.
항상 시작할 땐 기대로 마음이 들뜨지만 끝내면서 돌아오는 건 기대보다 더 큰 실망감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서 내성도 생기고 뻔 한 상술을 알아보는 눈도 생겼지만 그래도 또 치료 방법이 있다면 안 해볼 수가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특수학교 유치원에 들어가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한 때는 복도 이쪽에서 저쪽까지 혼자 넘어지고 구르고 하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던 적도 있었지만 계절이 바뀌면 또다시 기운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다른 재능을 키워주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아이는 유난이도 공부에 흥미를 가졌고 학습지를 하고 책을 보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지적 장애였고 학습 능력이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 가운데서 아이는 눈에 뛰게 영특하였다. 나도 작은 집단에서이지만 딸이 주목받는 게 내심 좋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나는 자연스레 다른 엄마들과 어울렸고 다들 비슷한 크기의 아픔 하나씩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도 많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도 종종 나눌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애의 유형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왠지 모를 동경과 부러움도 있었다.
'우리 아이도 저렇게 걸어 다녔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가 저렇게 말도 잘 하고 똑똑했으면 참 좋겠다...' 평생 가야 채워줄 수가 없는 부분인 줄 알지만 그래도 자기 아이가 좀 더 완전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 엄마의 마음인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딸아이는 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일반학교엔 계단이 많고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아이는 특수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에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그런 우리아이에게 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을 모두 받고 자라서였던 것 같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세상을 사랑할 줄도 안다는 말처럼 우리 아이는 바르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결혼을 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살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아프고 장애를 갖게 되어 세상이 끝난 것 마냥 슬픔에 쌓여 있었고 또다시 딸아이를 보며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아이에게도 장애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고 절망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바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자신에 몫을 살아가고 있는데 엄마인 내가 그런 아이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하며 힘들어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생각이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딸아이뿐만 아니라 한 살 차이 여동생, 두 살 차이 남동생을 함께 보살펴야 했지만 모든 일상은 큰 딸아이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침에 준비를 해서 스쿨버스를 태워 학교에 보내고 점심때 학교에 가서 밥을 챙겨주고 화장실도 데려 가야 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나의 손길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아이였다. 그렇게 힘든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엄격했다. 하루 동안 스스로 생각했던 만큼의 성과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쉬는 법이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도 할 수가 없다고 나를 설득 시켰다. 장애가 있다고 하나씩 둘씩 나 자신에게 양보를 하다 보면 어떤 것도 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비록 몸이 불편해서 무언가를 하는데 힘이 많이 들더라도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못 해낼 일도 없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 생각이 닮아갔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특수학교에선 우리 아이가 늘 주인공이었고 그것은 나에게도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아이는 어느새 고3이 되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도 힘든 고3시절이겠지만 우리 아이에게는 그 의미가 좀 더 남달랐다. 그동안 혼자서 공부한 것을 세상에 처음 내보여야 했고 12년 간 다니던 특수학교를 떠나 새로운 사회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수능 시험이란 아이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하고 큰 사건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긴장과 걱정 속에서 보냈다. 혹시나 아이가 아프지나 않을까 그래서 그동안 공부 한 것들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나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오히려 의연하게 공부하며 일 년을 잘 보내었다. 나는 아이가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온갖 신경을 쏟았다. 때로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와 또 문제집을 들고 교육방송 앞에 앉는 아이가 내심 안쓰러웠지만 아이의 의지와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단지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수능시험이 가까워 오자 걱정되는 것도 많아졌다. 수능며칠 전 시험이 예정된 학교를 찾았다. 시험 장소 및 시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각 학교마다 장애학생을 위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물론 우리아이가 시험을 보게 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부분도 만족할 만 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하루 종일 수능시험을 보려면 화장실에 한두 번가야 하는 데 학교의 화장실은 우리아이가 도저히 이용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교육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담당자도 수긍을 하는 듯 적절히 조치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능 전 날인 예비소집 일에 다시 방문한 학교의 화장실은 많은 부분 달라져 있었다. 공간을 아주 넓게 개조하여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마음속에 담아두면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무엇이 불편한지 세상에 이야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충분히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변화와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수능을 며칠 남겨둔 시기부터 나의 몸에는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고 얼굴은 퉁퉁 부어 누가보아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병원도 다녀왔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마도 큰 시험을 앞두고 내가 딸아이보다 긴장도 많이 하고 신경도 많이 쓰고 해서 그런 증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드디어 시험 보는 날 아침이었다. 다행히도 딸아이의 컨디션은 좋아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나보다 아이의 몸 상태가 우선이었다. 나는 힘든 몸이었지만 또 씩씩한 모습으로 점심을 준비해서 딸과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딸아이가 시험을 보는 동안 나는 바로 옆 교실에서 기다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험은 끝났고 아이는 대견스럽게도 시험을 별 문제 없이 마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며칠간의 증세가 말끔히 사라진 것이었다. 진짜 마음의 병인 모양이었다.
딸아이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310점이라는 수능점수를 받았고 자신이 원하던 한림대학교 사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딸아이의 대학교 입학 너무나도 기쁜 일이지만 심란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물론 당장은 좋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이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줄지 모르기에 걱정이 앞서는 게 엄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림대학교에서 장애 학생이 입학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학기가 시작되었고 수강신청 직후부터 나의 새로운 삶도 시작되었다. 나는 시간표를 받아들고 강의실을 하나하나 찾아 다녔다. 미리 한 번씩 가봐야 수업 갈 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또 강의실 찾느라 수업에 늦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아이는 무사히 첫 수업을 잘 들을 수가 있었고 학기 시작하고 며칠간은 나도 아이도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나는 그 후 4년간을 매일 같이 딸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욕심이 많은 아이인지라 수업이외에도 과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딸이 장애 때문에 과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었고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MT도 학기에 한 번씩은 참여를 했고 동아리활동도 하게 했고 정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답사도 함께 다녔다. MT를 가면 나는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왔다가 밤 12시가 넘으면 다시 데리러갔다.
딸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또 최대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딸이 장애가 있다고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움츠리거나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은 1학년 2학기부터 사학과 학술 동아리에 들어가 4학년까지 활동을 했다. 학기 중엔 거의 매주 저녁에 모여서 세미나를 했는데 물론 나는 딸을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렸다. 세미나 끝나고 뒤풀이가 있는 날엔 어김없이 함께 해주었다.
그 시절 나는 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기분 좋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의 피곤함도 잊고 나는 밤늦게까지 따라다닐 수 있었다. 딸의 전공인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답사가 꼭 필요한 활동이었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3박 4일이나 되는 답사에 참여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딸은 학부 시절 동안 여섯 번이나 답사에 참여했다. 나는 딸이 공부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디든 함께 갈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답사를 가서도 혹시나 우리 딸 때문에 일정에 지장이라도 주지 않을까 나는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준비했고 움직였다.
그런데 답사를 가면 엄마인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휠체어를 들고 높은 계단을 오를 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답사 일정에 자신들도 지칠 텐데...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딸과 함께 해주는 친구들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나에게도 어머니- 어머니- 하며 잘 따라서 마치 모두가 나의 자식들인 것 같았다.
딸과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세상에는 마음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흔히 힘들어서 못한다고 하는 건 마음의 의지가 없어서 이지 진짜로 불가능한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딸은 4학년이 되었다. 유난히 덥던 6월의 어느 날 졸업 사진을 찍었다. 졸업 사진을 찍는 날짜가 나오면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준비할 게 많아진다. 한창 예쁠 나이에 제일 예뻐야 할 날이다. 안 입던 정장을 차려 입고 비싼 돈을 들여서 메이크업도 받는다.
나는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딸이 초라해 보이기라도 할까봐 친구들과 똑같이 꾸며 주고 싶었다. 며칠 동안 고르고 골라서 딸에게 맞는 정장 한 벌을 샀고 메이크업도 친구들과 같은 곳에서 하기로 예약을 했다.
사진 찍는 날 아침 일찍 준비를 해서 메이크업 받을 숍으로 갔다. 한 시간 넘게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딸과 나는 학교로 향했다. 나는 딸이 힘이 빠져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까봐 빨리빨리 움직였다.
먼저 실내에서 사진을 찍고 야외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조별 사진을 찍고 교수님들과 다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나는 딸이 사진 속에서 만큼은 친구들과 똑같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비록 휠체어를 탔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친구들과 똑같이 꾸며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참 예쁘고 딸의 얼굴에선 반짝반짝 빛이 난다.
4학년 2학기가 되자 딸은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내색은 안하지만 조금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우리 딸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한통의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대학원 진학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생각이 깊은 아이라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 보았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공부로 인정받고 싶단 이야기를 종종 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편지에서는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강단에 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힘들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할 수 없는 딸의 이야기였다. 나는 딸의 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후에도 주위에서 여러 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장애가 있으니 대학원 공부가 힘들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지만 딸의 의지가 너무나도 굳건했기에 나는 무조건 딸의 편이 되어주었다. 대학원 전형에 응시하여 무사히 합격을 했다. 그 후 딸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 하는 듯 보였다.
언제나 시작과 끝은 맞닿아 있다. 대학의 졸업은 대학원의 입학으로 이어졌다. 4년 동안 정말로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 왔다. 결석도 지각도 한 번 안 했고 딸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졸업할 때는 총 성적이 과에서 2등이었다. 나는 딸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딸과 나는 항상 즐거운 마음이었다. 4년의 노력은 졸업으로 결실을 잘 맺었지만 또 다른 시작이 딸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학부 때보다 수업 듣는 건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나의 역할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딸과 함께 수업시간에 맞추어 학교를 오고가야 했다. 마침 그즈음 남편이 명예퇴직을 했고 그 후부터는 남편역시 딸이 공부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었다. 딸은 금방 대학원 공부에 적응을 했고 또 그것에 열정을 다했다.
그렇게 늘 바쁘게만 지냈다. 그래서 내 몸 따위는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이가 드는 줄도 모르고 아플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의 몸에 갑자기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마비가 올라오기 시작하여 걸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나는 큰 절망감에 휩싸였고 우울함이 온 마음에 가득 찼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우리 딸이었다. 나의 빈자리가 딸아이에게 너무나도 클 텐데...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입원과 검사 치료를 거듭하며 점점 몸이 호전되어 갔다. 그렇지만 아프기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가지게 되었다. 이병은 평생가도 완치 되지 않는다고 의사가 이야기 했다.
처음 이이야기를 접했을 때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도 힘들고 마음이 아팠지만 딸아이가 어릴 적에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을 떠올리며 다시 희망을 찾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나는 더욱더 의연해 졌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가끔씩은 내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딸에게 손이 먼저 가기도 했다. 그렇게 딸은 나에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또 시간은 흘러 어느덧 딸의 석사과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내가 아픈 것에 내심 신경이 쓰였겠지만 의연하게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거쳐서 드디어 딸의 논문이 완성되었다.
나 역시 딸만큼 기쁘고 뿌듯했다. 논문의 완성본을 찾아오던 날, 나는 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딸과 나, 둘만이 느끼고 공유하는 감정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함께 학교를 다닌 7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학위수여식이 있던 날, 나는 또 다시 딸을 예쁘게 꾸며서 학교로 향했다. 그날은 식구들 모두가 함께였다. 입구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가족들에게 여기는 뭐하는 데고 여기서는 뭘 했고 또 저기서는 뭘 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나에게도 학교는 여러 가지 추억이 긷든 소중한 곳이었다.
학위를 받은 후 자신감이 넘치던 딸에게도 큰 시련이 하나 찾아왔다. 장애를 이유로 한 박사과정의 불합격,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 못해 낼 것이 없다고 믿었던 딸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딸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고 나는 딸과 함께 마음으로 울었다.
세상은 정말 내 마음 같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 잘나고 똑똑한 딸이지만 세상은 그냥 한명의 장애인으로 볼뿐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딸은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래서 1년 과정으로 사회복지학 공부도 시작했다.
역시나 딸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고 1년 만에 사회복지사 1급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춘천시 장애인 근로사업장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자신의 역할을 잘해내며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역사학공부를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는 건 엄마로서 무척 마음이 아프지만 딸이 또 다른 꿈을 꾸고 직장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온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찬다.
직장에서 우리 딸은 이미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곳이란 사업장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이 전혀 없고 똑같은 동료로서 모두가 인식을 한다. 그리고 우리 딸과 같은 중증의 장애인도 능력을 발휘하여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곳이 이 사업장이었다. 우리 딸이 이런 사업장과 인연이 닿은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행운이란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믿는다. 우리 딸이 박사과정 불합격 이후 힘들다는 것을 핑계로 그 어떤 것도 시작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딸을 직장에 출근시키고 또 퇴근시간이 되면 데리러 가야한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직장을 다니는 것만 해도 힘들법한대 우리 딸은 이지역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에도 발 벗고 나선다. 뇌병변 장애인 자조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한 달에 한번 주말에 정기모임 및 활동을 진행한다. 이 모임은 딸이 집에서만 지내는 후배들의 사회참여를 도모하기 위에 만든 모임으로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의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 인권 활동에도 참여를 하여 엄마인 나도 활동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딸아이의 활동을 함께 하면서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운다. 먼저 인식이 바꿔야 한다는 것, 장애를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루빨리 이러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장애인의 엄마로 30년을 넘게 살았다. 그래서 이제는 내 마음이 장애인 마음 같고 내가 장애인인 듯하다. 딸과 함께 같은 마음으로 같은 꿈을 꾸었고 또 함께 꿈을 현실로 이루어 내었다.
지금 32살이 된 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평생을 함께할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바람이 꼭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딸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건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현실로 이루어짐을 경험했다. 나와 딸이 함께한 시간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고 꿈꾸며 준비하고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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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공단은 장애인고용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장애인고용촉진 강조기간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매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에세이,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공모를 실시해왔다.
올해로 22회를 맞은 작품현상공모전의 주제는 ‘장애인고용’으로 에세이, 인쇄매체디자인, 사진, 환경 및 실내디자인 등 네 분야 입상작 총 27점이 결정됐다. 본지는 환경 및 실내디자인을 제외한 입상작을 분야별로 소개할 예정이다. 다섯번째는 에세이 분야 장려 작품.
엄마와 딸, 같은 꿈을 꾸다...
이인숙(여, 57세, 강원 춘천)
스물다섯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7남매의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통해 큰 어려움도 없이 자랐고 학교 졸업 후에도 바로 직장에 들어가 바쁘게만 살아왔다.
남편은 나와는 사뭇 다른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6.25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단둘이 30년 가까이를 살아온 것이었다. 그러한 다름에 마음이 끌렸던 것인지 남편과 나는 만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지극히 평범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어떤 엄마가 될지도 전혀 몰랐다. 단지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고 행복하게만 살 줄 알았다.
남편은 외롭게 자란 지라 유난히도 아이를 기다렸다. 결혼을 한지 1년 8개월 만에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혹시라도 뱃속의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심한 일도 안하고 편하게만 열 달을 지냈다.
그런데 예정일이 되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병원을 찾아가니 뱃속 아이가 너무도 커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의사가 말했다. 유도 분만까지 하여 정말 힘들게 아이는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난 첫 딸 아이는 가족들 모두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었고 그 무엇보다 귀한 선물이었다.
정말 그때는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병원에서 퇴원할 때 아이에게 황달이 조금 있다고 해서 걱정을 했지만 병원에서 준 약을 아이에게 매일 매일 먹이고 또 며칠 후에 병원 치료 받으러 갔을 땐 괜찮아졌다고 하여 한시름 놓았다.
어느덧 아이의 첫돌이 되었다. 첫돌이 지나고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한발 두발씩 걸어 다녔다. 그런데 말은 얼마나 잘하는지 못할 말이 없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냉장고 텔레비전...” 하면서 이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계속 중얼 거리는 것이었다.
주위에 사람들은 아이가 아주 천재야 저렇게 영리할 수는 없어 하면서 칭찬을 하였다. 나는 아이가 진짜 천재인 줄 알았고 커서도 비범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둘째 딸이 태어났다. 그때 만해도 시어머니가 혼자 사셨으니 외롭기도 하고 해서 큰 딸 아이는 할머니한테 보내고 나는 둘째딸을 데리고 있었다.
남편은 그때 직장 생활에 항상 바빴고 늦은 밤에야 퇴근을 하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큰 아이를 보러 가고 둘째 아이를 열심히 기르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많이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시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왔는데 열이 떨어지질 않는다고 놀라서 이야기를 했다. 나도 놀란 마음에 아이를 찾아갔다.
아이를 보는 순간 그전과는 많이 달랐다. 힘이 쭉 빠져있고 고개가 끄덕끄덕 하면서 잘 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정말 억장이 무너졌다.
나는 다음날 새벽 같이 아이를 데리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갔다. 그러자 여러 가지 검사가 시작되었다. 20일 정도 입원해서 검사한 결과 뇌성마비라는 판정을 받았다.
나에게 두 살 난 딸아이의 뇌성마비 판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시련이었다. 6개월 운동하고 치료하면 괜찮아진다던 아이가 점점 더 힘이 없어지고 잘 걷지도 못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니까 그런 아이를 보고 슬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낫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라도 시도해 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의연하고 강해졌다. 세상에 무서울 게 하나도 없어야 장애 아이의 엄마로 살 수가 있었다. 그때는 열심히 물리치료 받으면 아이가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쩔 수 없이 둘째아이를 또 시어머니한테 또 보내야 했다. 그때는 강원도 영월에 살고 있었는데 새벽에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시청을 지나 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하면 물리치료 50분 작업치료 50분 그리고 준비해 온 김밥을 병원에서 둘이 먹고 다시 집으로 오면 밤 12시가 넘었다.
그때 아빠는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를 만나면 큰일이라도 한 듯이 반가워하면서 안겼다. 그렇게 몇 년을 열심히 다녔지만 별로 좋아지는 느낌이 없었다.
나는 아이의 치료를 위해 정말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 병원에서 새로 어떤 검사나 치료법이 생겼다고 할 때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고 유명한 침술사가 있다고 하면 나는 아이를 업고 어디든 쫓아갔다.
항상 시작할 땐 기대로 마음이 들뜨지만 끝내면서 돌아오는 건 기대보다 더 큰 실망감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서 내성도 생기고 뻔 한 상술을 알아보는 눈도 생겼지만 그래도 또 치료 방법이 있다면 안 해볼 수가 없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특수학교 유치원에 들어가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한 때는 복도 이쪽에서 저쪽까지 혼자 넘어지고 구르고 하면서 비틀비틀 걸어갔던 적도 있었지만 계절이 바뀌면 또다시 기운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나는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다른 재능을 키워주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아이는 유난이도 공부에 흥미를 가졌고 학습지를 하고 책을 보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지적 장애였고 학습 능력이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 가운데서 아이는 눈에 뛰게 영특하였다. 나도 작은 집단에서이지만 딸이 주목받는 게 내심 좋았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나는 자연스레 다른 엄마들과 어울렸고 다들 비슷한 크기의 아픔 하나씩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도 많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말들도 종종 나눌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애의 유형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왠지 모를 동경과 부러움도 있었다.
'우리 아이도 저렇게 걸어 다녔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아이가 저렇게 말도 잘 하고 똑똑했으면 참 좋겠다...' 평생 가야 채워줄 수가 없는 부분인 줄 알지만 그래도 자기 아이가 좀 더 완전해 지기를 바라는 것이 엄마의 마음인 것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딸아이는 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 그때만 해도 일반학교엔 계단이 많고 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특수학교에 입학시켰다.
아이는 특수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에 점점 더 흥미를 느끼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학교의 선생님들도 그런 우리아이에게 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관심과 칭찬을 모두 받고 자라서였던 것 같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가 세상을 사랑할 줄도 안다는 말처럼 우리 아이는 바르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아이는 엄마인 나에게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결혼을 할 때만 해도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살 줄 알았는데 딸아이가 아프고 장애를 갖게 되어 세상이 끝난 것 마냥 슬픔에 쌓여 있었고 또다시 딸아이를 보며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아이에게도 장애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고 절망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바르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자신에 몫을 살아가고 있는데 엄마인 내가 그런 아이 앞에서 죽는 소리를 하며 힘들어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생각이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딸아이뿐만 아니라 한 살 차이 여동생, 두 살 차이 남동생을 함께 보살펴야 했지만 모든 일상은 큰 딸아이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아침에 준비를 해서 스쿨버스를 태워 학교에 보내고 점심때 학교에 가서 밥을 챙겨주고 화장실도 데려 가야 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나의 손길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아이였다. 그렇게 힘든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엄격했다. 하루 동안 스스로 생각했던 만큼의 성과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쉬는 법이 없었다.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엇도 할 수가 없다고 나를 설득 시켰다. 장애가 있다고 하나씩 둘씩 나 자신에게 양보를 하다 보면 어떤 것도 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비록 몸이 불편해서 무언가를 하는데 힘이 많이 들더라도 남들보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열심히 노력한다면 못 해낼 일도 없다고 생각했고 나도 그 생각이 닮아갔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특수학교에선 우리 아이가 늘 주인공이었고 그것은 나에게도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아이는 어느새 고3이 되었다. 평범한 아이들에게도 힘든 고3시절이겠지만 우리 아이에게는 그 의미가 좀 더 남달랐다. 그동안 혼자서 공부한 것을 세상에 처음 내보여야 했고 12년 간 다니던 특수학교를 떠나 새로운 사회를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였다.
수능 시험이란 아이의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하고 큰 사건이었다. 나는 하루하루 긴장과 걱정 속에서 보냈다. 혹시나 아이가 아프지나 않을까 그래서 그동안 공부 한 것들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끝나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오히려 의연하게 공부하며 일 년을 잘 보내었다. 나는 아이가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온갖 신경을 쏟았다. 때로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와 또 문제집을 들고 교육방송 앞에 앉는 아이가 내심 안쓰러웠지만 아이의 의지와 열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단지 마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수능시험이 가까워 오자 걱정되는 것도 많아졌다. 수능며칠 전 시험이 예정된 학교를 찾았다. 시험 장소 및 시설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각 학교마다 장애학생을 위한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물론 우리아이가 시험을 보게 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부분도 만족할 만 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하루 종일 수능시험을 보려면 화장실에 한두 번가야 하는 데 학교의 화장실은 우리아이가 도저히 이용할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교육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담당자도 수긍을 하는 듯 적절히 조치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수능 전 날인 예비소집 일에 다시 방문한 학교의 화장실은 많은 부분 달라져 있었다. 공간을 아주 넓게 개조하여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마음속에 담아두면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무엇이 불편한지 세상에 이야기하고 개선을 요구하면 충분히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고 그것은 또한 변화와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수능을 며칠 남겨둔 시기부터 나의 몸에는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돋았고 얼굴은 퉁퉁 부어 누가보아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병원도 다녀왔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마도 큰 시험을 앞두고 내가 딸아이보다 긴장도 많이 하고 신경도 많이 쓰고 해서 그런 증상이 나타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드디어 시험 보는 날 아침이었다. 다행히도 딸아이의 컨디션은 좋아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나보다 아이의 몸 상태가 우선이었다. 나는 힘든 몸이었지만 또 씩씩한 모습으로 점심을 준비해서 딸과 함께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딸아이가 시험을 보는 동안 나는 바로 옆 교실에서 기다렸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시험은 끝났고 아이는 대견스럽게도 시험을 별 문제 없이 마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험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며칠간의 증세가 말끔히 사라진 것이었다. 진짜 마음의 병인 모양이었다.
딸아이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310점이라는 수능점수를 받았고 자신이 원하던 한림대학교 사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딸아이의 대학교 입학 너무나도 기쁜 일이지만 심란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물론 당장은 좋지만 장애가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세상이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줄지 모르기에 걱정이 앞서는 게 엄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림대학교에서 장애 학생이 입학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학기가 시작되었고 수강신청 직후부터 나의 새로운 삶도 시작되었다. 나는 시간표를 받아들고 강의실을 하나하나 찾아 다녔다. 미리 한 번씩 가봐야 수업 갈 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또 강의실 찾느라 수업에 늦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아이는 무사히 첫 수업을 잘 들을 수가 있었고 학기 시작하고 며칠간은 나도 아이도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나는 그 후 4년간을 매일 같이 딸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욕심이 많은 아이인지라 수업이외에도 과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딸이 장애 때문에 과에서 소외되는 것이 싫었고 모든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MT도 학기에 한 번씩은 참여를 했고 동아리활동도 하게 했고 정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답사도 함께 다녔다. MT를 가면 나는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왔다가 밤 12시가 넘으면 다시 데리러갔다.
딸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는 무척이나 좋았다. 또 최대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딸이 장애가 있다고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움츠리거나 뒤돌아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은 1학년 2학기부터 사학과 학술 동아리에 들어가 4학년까지 활동을 했다. 학기 중엔 거의 매주 저녁에 모여서 세미나를 했는데 물론 나는 딸을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렸다. 세미나 끝나고 뒤풀이가 있는 날엔 어김없이 함께 해주었다.
그 시절 나는 딸이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기분 좋아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의 피곤함도 잊고 나는 밤늦게까지 따라다닐 수 있었다. 딸의 전공인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답사가 꼭 필요한 활동이었는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3박 4일이나 되는 답사에 참여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딸은 학부 시절 동안 여섯 번이나 답사에 참여했다. 나는 딸이 공부하는데 필요하다면 어디든 함께 갈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답사를 가서도 혹시나 우리 딸 때문에 일정에 지장이라도 주지 않을까 나는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준비했고 움직였다.
그런데 답사를 가면 엄마인 내가 모든 걸 다 해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휠체어를 들고 높은 계단을 오를 때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답사 일정에 자신들도 지칠 텐데...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딸과 함께 해주는 친구들에게 정말로 고마웠다. 나에게도 어머니- 어머니- 하며 잘 따라서 마치 모두가 나의 자식들인 것 같았다.
딸과 나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세상에는 마음만 있으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흔히 힘들어서 못한다고 하는 건 마음의 의지가 없어서 이지 진짜로 불가능한 일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딸은 4학년이 되었다. 유난히 덥던 6월의 어느 날 졸업 사진을 찍었다. 졸업 사진을 찍는 날짜가 나오면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준비할 게 많아진다. 한창 예쁠 나이에 제일 예뻐야 할 날이다. 안 입던 정장을 차려 입고 비싼 돈을 들여서 메이크업도 받는다.
나는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 딸이 초라해 보이기라도 할까봐 친구들과 똑같이 꾸며 주고 싶었다. 며칠 동안 고르고 골라서 딸에게 맞는 정장 한 벌을 샀고 메이크업도 친구들과 같은 곳에서 하기로 예약을 했다.
사진 찍는 날 아침 일찍 준비를 해서 메이크업 받을 숍으로 갔다. 한 시간 넘게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도 예쁘게 하고 딸과 나는 학교로 향했다. 나는 딸이 힘이 빠져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까봐 빨리빨리 움직였다.
먼저 실내에서 사진을 찍고 야외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조별 사진을 찍고 교수님들과 다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나는 딸이 사진 속에서 만큼은 친구들과 똑같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비록 휠체어를 탔다는 것이 다르지만 그 외의 것들은 친구들과 똑같이 꾸며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보아도 참 예쁘고 딸의 얼굴에선 반짝반짝 빛이 난다.
4학년 2학기가 되자 딸은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내색은 안하지만 조금 힘들어 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우리 딸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한통의 편지로 마음을 전했다.
대학원 진학 마음을 굳힌 듯 했다. 생각이 깊은 아이라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 보았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공부로 인정받고 싶단 이야기를 종종 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편지에서는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강단에 서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힘들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할 수 없는 딸의 이야기였다. 나는 딸의 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후에도 주위에서 여러 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장애가 있으니 대학원 공부가 힘들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지만 딸의 의지가 너무나도 굳건했기에 나는 무조건 딸의 편이 되어주었다. 대학원 전형에 응시하여 무사히 합격을 했다. 그 후 딸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 하는 듯 보였다.
언제나 시작과 끝은 맞닿아 있다. 대학의 졸업은 대학원의 입학으로 이어졌다. 4년 동안 정말로 앞만 보며 열심히 살아 왔다. 결석도 지각도 한 번 안 했고 딸은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졸업할 때는 총 성적이 과에서 2등이었다. 나는 딸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딸과 나는 항상 즐거운 마음이었다. 4년의 노력은 졸업으로 결실을 잘 맺었지만 또 다른 시작이 딸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학부 때보다 수업 듣는 건 많이 줄었다. 그렇다고 나의 역할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나는 여전히 딸과 함께 수업시간에 맞추어 학교를 오고가야 했다. 마침 그즈음 남편이 명예퇴직을 했고 그 후부터는 남편역시 딸이 공부하는 것을 많이 도와주었다. 딸은 금방 대학원 공부에 적응을 했고 또 그것에 열정을 다했다.
그렇게 늘 바쁘게만 지냈다. 그래서 내 몸 따위는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이가 드는 줄도 모르고 아플 수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나의 몸에 갑자기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턴가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마비가 올라오기 시작하여 걸을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나는 큰 절망감에 휩싸였고 우울함이 온 마음에 가득 찼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우리 딸이었다. 나의 빈자리가 딸아이에게 너무나도 클 텐데...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나는 입원과 검사 치료를 거듭하며 점점 몸이 호전되어 갔다. 그렇지만 아프기 전과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가지게 되었다. 이병은 평생가도 완치 되지 않는다고 의사가 이야기 했다.
처음 이이야기를 접했을 때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도 힘들고 마음이 아팠지만 딸아이가 어릴 적에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지만 지금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을 떠올리며 다시 희망을 찾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나는 더욱더 의연해 졌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가끔씩은 내가 아프다는 것도 잊고 딸에게 손이 먼저 가기도 했다. 그렇게 딸은 나에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또 시간은 흘러 어느덧 딸의 석사과정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은 내가 아픈 것에 내심 신경이 쓰였겠지만 의연하게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거쳐서 드디어 딸의 논문이 완성되었다.
나 역시 딸만큼 기쁘고 뿌듯했다. 논문의 완성본을 찾아오던 날, 나는 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딸과 나, 둘만이 느끼고 공유하는 감정이 있었다. 우리는 그때 함께 학교를 다닌 7년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학위수여식이 있던 날, 나는 또 다시 딸을 예쁘게 꾸며서 학교로 향했다. 그날은 식구들 모두가 함께였다. 입구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가족들에게 여기는 뭐하는 데고 여기서는 뭘 했고 또 저기서는 뭘 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다 해주었다. 나에게도 학교는 여러 가지 추억이 긷든 소중한 곳이었다.
학위를 받은 후 자신감이 넘치던 딸에게도 큰 시련이 하나 찾아왔다. 장애를 이유로 한 박사과정의 불합격, 인간의 의지로 세상에 못해 낼 것이 없다고 믿었던 딸에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딸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냈고 나는 딸과 함께 마음으로 울었다.
세상은 정말 내 마음 같지가 않았다.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 잘나고 똑똑한 딸이지만 세상은 그냥 한명의 장애인으로 볼뿐이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딸은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래서 1년 과정으로 사회복지학 공부도 시작했다.
역시나 딸은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었고 1년 만에 사회복지사 1급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춘천시 장애인 근로사업장에서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자신의 역할을 잘해내며 사회복지사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역사학공부를 잠시 접어두어야 했다는 건 엄마로서 무척 마음이 아프지만 딸이 또 다른 꿈을 꾸고 직장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온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찬다.
직장에서 우리 딸은 이미 장애인이 아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곳이란 사업장의 특성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이 전혀 없고 똑같은 동료로서 모두가 인식을 한다. 그리고 우리 딸과 같은 중증의 장애인도 능력을 발휘하여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곳이 이 사업장이었다. 우리 딸이 이런 사업장과 인연이 닿은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행운이란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고 믿는다. 우리 딸이 박사과정 불합격 이후 힘들다는 것을 핑계로 그 어떤 것도 시작하고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업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딸을 직장에 출근시키고 또 퇴근시간이 되면 데리러 가야한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 직장을 다니는 것만 해도 힘들법한대 우리 딸은 이지역의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에도 발 벗고 나선다. 뇌병변 장애인 자조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한 달에 한번 주말에 정기모임 및 활동을 진행한다. 이 모임은 딸이 집에서만 지내는 후배들의 사회참여를 도모하기 위에 만든 모임으로 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의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 인권 활동에도 참여를 하여 엄마인 나도 활동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딸아이의 활동을 함께 하면서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운다. 먼저 인식이 바꿔야 한다는 것, 장애를 차별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루빨리 이러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장애인의 엄마로 30년을 넘게 살았다. 그래서 이제는 내 마음이 장애인 마음 같고 내가 장애인인 듯하다. 딸과 함께 같은 마음으로 같은 꿈을 꾸었고 또 함께 꿈을 현실로 이루어 내었다.
지금 32살이 된 딸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평생을 함께할 좋은 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바람이 꼭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딸아이를 키우면서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건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현실로 이루어짐을 경험했다. 나와 딸이 함께한 시간은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고 꿈꾸며 준비하고 노력하면 이루어지는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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